폭정에 맞선 시민들의 상징 – 오렌지 전쟁의 역사와 기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Piemonte) 주에 위치한 소도시, 이브레아(Ivrea)는 해마다 2월 말이면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로 가득 찬다. 바로 이브레아의 가장 상징적인 축제인 ‘오렌지 전쟁(Battaglia delle Arance)’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축제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중세 봉건 시대의 폭군에 맞서 싸운 시민 저항의 역사적 상징을 담고 있다. 오렌지를 무기 삼아 벌이는 이 장대한 모의 전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특하고 열정적인 축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오렌지 전쟁의 기원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이브레아를 지배하던 잔인한 군주는 결혼한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야 하는 ‘초야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시민들에게 크나큰 굴욕과 고통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밀러의 딸인 비올라(Violetta)라는 젊은 여성이 이 권리에 강하게 저항하며 군주의 머리를 베어내고 봉기를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도시 전체에 자유의 불꽃을 지폈고, 주민들은 무기를 들고 봉건 권력에 대항하게 된다. 이 역사적 사건은 이브레아 시민들의 자긍심이자 해방의 출발점으로 기억되며, 오렌지 전쟁은 이 전설을 기리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콩이나 사과처럼 덜 위험한 농작물을 던지며 전투를 재현했지만, 19세기 후반부터는 지금의 상징이 된 오렌지가 전장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오렌지들이 북부로 운반되었고, 팔지 못한 과일을 축제에 활용하는 실용적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렌지는 저항의 상징, 그리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도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금은 매년 약 500톤 이상의 오렌지가 사용되며, 이는 단순한 음식 낭비가 아니라 도시의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문화적 투자로 간주된다.
이브레아의 오렌지 전쟁은 단순한 전설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축제는 자유를 위한 시민의 저항, 독재에 맞선 개인의 용기, 공동체의 단합과 연대의 정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오렌지를 던지는 행위는 단지 공격이 아니라 ‘과거의 억압에 대한 선언’이며, ‘현재의 자유를 확인하는 의식’인 셈이다. 이브레아 시민들은 해마다 이 거대한 전쟁극을 통해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다시금 되새기고, 외부인들과 그 역사적 의미를 공유한다.
오렌지를 던지는 규칙과 역할 – 마차 위의 군대와 거리의 시민들
이브레아의 오렌지 전쟁은 단순히 오렌지를 서로 던지는 난장판이 아니다. 잘 조직된 팀, 엄격한 규칙, 그리고 역할 분담 속에서 일종의 전쟁 시뮬레이션처럼 진행된다. 축제 기간 동안 도시는 마치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변하고, 각 등장인물들은 역사적 상징을 가지고 ‘연기’를 펼친다. 그 속에는 중세의 봉건군주, 시민 반란군, 귀족, 기수, 깃발 지휘관까지 모두 등장하며, 관람객들은 이를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극으로 체험하게 된다.
오렌지 전쟁의 중심은 두 세력으로 나뉜다. 하나는 ‘마차 위의 병사들(Squadre dei Carri da Getto)’이고, 다른 하나는 ‘거리의 시민군(Squadre a piedi)’이다. 마차 위 병사들은 귀족 세력을 상징하며,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채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등장한다. 이들은 축제 기간 동안 도시 곳곳을 돌며 시민들과 전투를 벌인다. 반면, 시민군은 도보로 움직이며 얼굴을 붉은 스카프로 감싸고 오렌지를 무기로 사용한다. 이들은 중세 시대 억압에 대항하던 시민 봉기 세력을 상징한다.
특히 마차 위 병사들은 무장 상태로 말 위에 올라타기 때문에 시민군보다는 방어에 유리하지만, 공격 속도와 민첩성에서는 불리하다. 시민군은 각기 다른 팀에 소속되어 있으며, 고유의 색과 문장을 사용해 구분된다. 팀별로 훈련도 받으며, 전략적으로 거리를 점령하고 기습을 감행하는 등 실제 전투 못지않은 치밀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브레아 전체가 격전지가 되며, 약 9개 지역에 걸쳐 전투가 분산되어 벌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 관람객은 오렌지 전투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여를 원하면 사전에 팀 등록과 규정된 복장을 갖춰야 하며, 무엇보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관광객은 ‘붉은 모자’를 착용함으로써 ‘비폭력 중립자’임을 표시한다. 이 붉은 모자는 역사 속 시민들이 군주의 성에서 도망칠 때 쓰던 모자에서 유래되었고, 이는 오늘날 축제에서 안전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붉은 모자를 쓴 사람을 향해 오렌지를 던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퇴장이나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다.
또한 이브레아 시청은 축제를 보다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해 매년 규정을 정비하고 있다. 오렌지는 반드시 던지는 방향, 팀별 위치, 시간대에 맞춰 사용되어야 하며, 고의적인 상해를 입히려는 행위는 금지된다. 오렌지를 쌓아두는 장소도 미리 지정되고, 팀별 오렌지 배급량도 조정된다. 이처럼 오렌지 전쟁은 통제와 자율이 공존하는 전통적 전쟁놀이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오렌지 세례의 체험 – 온몸으로 느끼는 시민 혁명의 열기
이브레아의 오렌지 전쟁은 단순히 구경하는 축제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야만 진정한 의미를 체험할 수 있는 행위 예술에 가깝다. 축제가 시작되면 도시는 순식간에 오렌지 향으로 가득 차고, 공중에는 과즙이 흩날리며, 거리는 과육으로 진창이 된다. 참가자들은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안고 오렌지를 움켜쥔 채 마치 진짜 전쟁터에 선 듯한 긴장 속으로 뛰어든다. 그 순간, 과거와 현재가 맞닿고, 신화가 현실로 스며든다.
가장 극적인 체험은 거리 한가운데, 마차가 돌진해 올 때 벌어진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오렌지 세례에 맞서 참가자들은 머리와 몸을 최대한 보호하며 응수하지만, 곧 온몸이 오렌지 과즙으로 젖는다. 그것은 마치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진다. 군중의 함성, 북소리, 깃발의 펄럭임, 그리고 이브레아 시민들의 뜨거운 열정은 보는 이마저 압도한다. 서로가 오렌지를 던지면서도 웃고, 때로는 포옹을 나누며 전투 후 평화를 선언한다. 이 축제는 단순한 혼란이 아닌, 질서 있는 해방의 제의다.
전투가 끝난 후 도시는 마치 한바탕 전쟁을 겪은 듯한 풍경으로 변한다. 거리는 오렌지 껍질과 과즙으로 범벅이 되고, 시민들은 서로의 멍자국과 옷의 흔적으로 오늘의 ‘투쟁’을 회상한다. 하지만 바로 그 흔적들이야말로 이브레아 시민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이자 정체성이다. 이브레아의 주민들은 말한다. “우리는 오렌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던지는 것이다.”
축제가 끝나면 곧이어 대대적인 청소 작업이 시작되지만, 도시 곳곳에 남은 오렌지 향과 오렌지 즙 자국은 그날의 열기를 며칠 동안 이어주곤 한다. 또한 외지에서 온 방문객들도 이 축제를 통해 지역민들과 교감하고, 전혀 다른 형태의 공동체 정신을 체험한다. 오렌지 전쟁은 단지 이브레아만의 축제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을 극복한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향한 열망이 축제의 형태로 승화된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