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과 흰색으로 뒤덮인 도시 – 축제의 유래와 역사
콜롬비아 남부의 도시 파스토(Pasto)는 매년 1월이 되면 전혀 다른 도시로 변모한다. 도시 전체가 흰색과 검은색의 물감, 분말, 그리고 환희로 뒤덮인다. 바로 ‘블랑코 이 네그로스 축제(Fiesta de Blancos y Negros)’ 덕분이다. 이 축제는 콜롬비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전통 축제 중 하나로, 그 기원은 원주민의 농업 축제, 스페인 식민 시대의 종교 의식, 아프리카 노예의 해방 기념 등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탄생한 독특한 축제다.
이 축제의 뿌리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주민과 아프리카 노예들은 자신의 문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기에, 종종 종교 축제나 성인의 날 등을 빌미로 몰래 자신들의 풍습을 표현했다. 특히 흑인 노예들은 하루 동안만 ‘자유’를 얻는 날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이 축제의 전신이다. 주인들이 특별히 하루를 허락하여 흑인들이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며 얼굴을 칠할 수 있게 했던 전통이, 시간이 흐르며 ‘검은 날(Día de Negros)’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 후, 이에 대응하는 ‘흰 날(Día de Blancos)’이 생기면서 백인과 원주민들도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었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칠하며 계층의 경계를 허무는 날로 바뀌었다. 결국 오늘날의 블랑코 이 네그로스는 인종, 계층, 종교를 초월한 콜롬비아인 모두의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축제는 2009년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서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 화합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오늘날 이 축제는 전통적인 행사뿐 아니라 현대적인 퍼레이드, 예술 전시, 대형 조형물 제작 등 다양한 예술적 표현이 결합되어 도시 전체가 예술의 캔버스가 된다.
물감과 분말의 전쟁 – 축제의 하이라이트와 체험
블랑코 이 네그로스 축제의 가장 큰 매력은 거리에서 펼쳐지는 ‘분장 전쟁’이다. 매년 1월 5일과 6일에 펼쳐지는 하이라이트, 즉 ‘흑인의 날(Día de Negros)’과 ‘백인의 날(Día de Blancos)’이 그것이다. 이틀간 시민들과 여행자들은 얼굴에 검은 페인트를 칠하거나 하얀 분말을 뿌리며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웃고 장난치며 거리를 누빈다.
첫날인 5일은 ‘흑인의 날’로, 사람들이 얼굴을 까맣게 칠한 채 거리를 활보한다. 이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를 기념하는 날이다. 놀라운 점은, 이 날 흰 사람도, 원주민도,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검은 페인트로 얼굴을 덮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오늘 우리는 모두 흑인이다’라는 연대의 표현이다. 이때 거리에는 북소리와 민속 춤이 울려 퍼지고, 축제의 에너지는 도시에 살아 숨 쉬는 듯 강렬하다.
다음 날인 6일은 ‘백인의 날’이다. 이날은 온 도시가 흰색 파우더로 뒤덮인다. 어린이들은 분무기와 분말총으로 흰색 가루를 뿌리며 놀고, 어른들은 서로의 얼굴에 하얀 분말을 바르며 인사를 건넨다. 이 하루 동안 사람들은 서로를 모르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장난을 치고 웃음을 주고받는다. 얼굴은 가려지고, 피부색도 지워진다. 이 축제는 결국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장이다.
또한 이틀간의 하이라이트 외에도, 1월 2일부터 7일까지 이어지는 축제 기간에는 퍼레이드, 전통 의상 경연, 대형 인형극, 민속 음악 공연, 어린이 행렬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대형 인형과 예술적인 수레가 줄지어 나오는 ‘카니발 퍼레이드’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끄는 행사 중 하나다.
이 축제를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여기서는 얼굴에 뿌려진 색만큼 마음도 열렸다.” 이 단순한 분말과 물감이 만들어내는 놀이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마음의 벽을 허무는 가장 순수한 언어가 된다.
지역 공동체의 자부심 – 문화예술과 경제적 가치
블랑코 이 네그로스 축제는 단순히 즐기는 축제를 넘어, 파스토 지역 사회에 깊은 문화적 뿌리와 경제적 활력을 제공한다. 파스토 시민들은 이 축제를 위해 거의 한 해 동안 준비하며, 지역 예술가, 조형가, 음악가, 무용가들이 이 과정에 참여하여 예술과 공동체의 협업을 실현한다.
특히 축제의 핵심 중 하나는 ‘거대 조형물 퍼레이드’다. 이 조형물들은 일종의 예술 작품으로, 파피에 마셰(종이 반죽)와 나무, 철골 등을 이용해 만들어지며, 제작에는 수개월이 소요된다. 한 작품은 지역의 신화, 역사, 풍자 등을 주제로 삼기도 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도 한다. 이러한 조형물은 지역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탄생하며, 이들의 명성과 실력은 콜롬비아 전국에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축제는 파스토의 경제에 큰 활력을 준다. 매년 1월, 이 도시에는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며 호텔, 식당, 기념품 가게, 교통 등 다양한 분야의 소득이 급증한다. 지역 정부와 기업들도 축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후원하고, 다양한 문화 산업과 연계된 프로젝트들이 추진된다. 예를 들어,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형 예술 워크숍이나 민속 음악 캠프가 열리며, 이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문화 유산이 계승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축제는 지역민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상징한다. 축제 준비에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마을 전체가 나서며, 이는 단순한 행사를 넘어 마치 공동체 전체의 연극이자 잔치가 된다. 수많은 파스토 시민들에게 이 축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되새기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러한 공동체 중심의 축제는 오늘날 전 세계 도시들이 주목하는 문화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단순한 소비와 관람을 넘어, 지역 주민이 직접 창조하고 참여하며, 문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연대하는 ‘살아 있는 축제’ – 그것이 바로 블랑코 이 네그로스의 진정한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