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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도 언어마다 다르다 – 세계 각국의 수화 비교 여행

by 정보주머니1 2025. 7. 17.

1. 미국수어와 영국수어는 왜 서로 통하지 않을까? – 수어도 ‘언어’다

수어도 언어마다 다르다 – 세계 각국의 수화 비교 여행
수어도 언어마다 다르다 – 세계 각국의 수화 비교 여행

많은 사람들이 수화를 단일한 글로벌 언어처럼 생각하곤 한다. 손동작만 다를 뿐, 보편적인 언어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수어는 말 그대로 ‘손으로 하는 언어’이며, 구어와 마찬가지로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 사회 속에서 독립적으로 발달해왔다. 이 점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례가 미국수어(ASL)영국수어(BSL)의 관계이다. 영미권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수어는 서로 완전히 통하지 않는다.

ASL은 사실 미국 독립 초기 프랑스에서 전해진 프랑스수어(LSF)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세기 초, 청각장애인 교육을 위해 설립된 미국의 첫 학교는 프랑스에서 초청된 교사 로랑 클레르(Laurent Clerc)에 의해 운영되었고, 그가 프랑스수어를 미국에 전파했다. 이후 미국 원주민들과 지역 사회의 제스처 등이 융합되면서 독자적인 ASL이 형성되었다.

반면, BSL은 영국 내부의 농아인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언어다. 영국의 수화는 발음 중심 교육법의 압력 속에서도 자생적인 발전을 이어갔고, 그 결과 손동작, 문법 구조, 단어 배열 등이 ASL과 현저히 다르다. 예를 들어, ASL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는 단일 손동작(I-L-Y 손모양)이나 문장으로 표현되지만, BSL에서는 순차적으로 각 단어를 손으로 표현해야 하며, 문법 구조 자체도 구어 영어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마치 한국어와 일본어, 혹은 독일어와 스페인어처럼 전혀 다른 언어의 차이와 같다. 수어는 단순히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조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음성언어처럼 수어도 어휘, 문법, 억양, 지역 방언까지 존재하며, 그 다양성은 전 세계의 청각장애인 문화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수어는 단순히 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표정과 몸짓, 시선까지 포함된 시공간적인 언어다. 이는 구어의 억양이나 문장의 리듬을 대체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며, 각국 수어마다 이러한 비수지적 요소의 사용법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일본수어(JSL)는 상대방을 향한 고개 움직임과 눈썹의 위치로 의문문을 표현하는 반면, 미국수어는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는 동작으로 질문을 만든다.

이처럼 수어는 단순한 시각적 상징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문화적 언어다. 미국과 영국의 예에서처럼, 수어도 ‘국가의 경계’를 따라 다르게 진화하고, 서로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의 하나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 동아시아의 수화: 한국수어, 일본수어, 중국수어의 공통점과 차이점

수어도 언어마다 다르다 – 세계 각국의 수화 비교 여행

동아시아 지역은 문화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수어는 독자적인 특징을 가진다. 특히 한국수어(KSL), 일본수어(JSL), 중국수어(CSL)는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유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 속에서도 매우 다른 수화 체계를 지닌다.

우선 한국수어는 2000년대 이후에야 공식적인 언어로 인정받았고, 2016년에 ‘한국수어법’이 제정되면서 공적 언어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한국어를 손동작으로 바꾸는’ 수단으로 오해받았고, 농인 문화의 고유성이 억압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수어는 고유한 어휘, 문법, 어순을 가진 독립 언어다. 예를 들어, ‘학교에 가다’라는 문장은 한국어에서는 주어-목적어-동사(SOV) 구조지만, 한국수어에서는 ‘학교+나+가다’처럼 개념 중심, 시각 중심으로 배열된다.

일본수어는 ‘니혼 쇼와(日本手話)’로 불리며, 청각장애인 공동체 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구화주의’가 교육의 중심이었지만, 농인들 사이에서 수어는 생활의 중심 언어로 이어졌다. 일본수어는 한자문화권의 특징을 반영하여 손가락 글자(지문자)와 표의적인 수화 기호가 혼합되어 있으며, 표정과 머리의 움직임이 문법적 요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수어는 광범위한 지역을 반영해 다양한 방언 수어가 존재한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표준수어’ 외에도 상하이, 광둥 등 각지의 농인 공동체가 독자적인 수화를 사용해왔다. 중국수어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기호가 중국어의 간체자 혹은 의미 중심 기호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숫자나 성씨를 나타내는 손 모양은 문자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세 나라 수어는 각각 자국어의 어순, 문화, 상징 체계를 반영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손 모양을 이용한 수치 표현,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동사(예: 주다, 받다), 표정의 중요성 등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한국수어의 존칭 표현, 일본수어의 강한 상징성, 중국수어의 지역 방언 차이는 매우 뚜렷하다.

또한, 세 나라 모두 수어 통역사 제도와 농인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점차 개선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수어 시인이나 수어로 하는 연극, 뉴스 방송 등 다양한 예술·정보 분야에서도 수어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수어는 언어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농인의 삶과 문화가 투영된 상징 체계로 자리 잡고 있다.

 

3. 수어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 국제수어(International Sign)의 가능성과 한계

 

세계가 점점 더 연결되는 글로벌 시대에, 수어도 서로 통할 수 있는 ‘국제 수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실제로 UN 회의나 세계 농아인 체육대회 등 국제 무대에서는 국제수어(International Sign, IS)가 사용된다. 하지만 국제수어는 각국의 수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의 정해진 언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더 가깝다.

국제수어는 특정한 문법이나 고정된 어휘집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세계 여러 수어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기호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ASL의 단어 몇 개, BSL의 표현, LSF(프랑스수어)의 문법 구조 등이 혼합되어 사용되며, 상황에 따라 서로 조율되는 형태다. 이는 마치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각자의 억양과 단어를 섞어가며 소통하는 ‘글로벌 잉글리시’와 비슷하다.

하지만 국제수어는 유창한 의사소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통역사의 숙련도에 따라 전달력이 달라지고, 농인 당사자들도 IS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지역성과 문화적 맥락이 중요한 수어에서, 국제수어는 복잡한 개념이나 정서 표현을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존경’이나 ‘애정’ 같은 추상적 표현은 각 수어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이를 IS로 단순화하면 뉘앙스가 사라지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어의 필요성은 분명하다. 국제 대회, 긴급 재난 상황, 다국적 농인 모임 등에서 최소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IS를 좀 더 체계화하려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는 보조수단일 뿐, 각국 수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국제수어의 존재는 수어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강조해준다. 단일한 수화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각 수어가 그만큼 고유하고 복잡하다는 증거다. 국제 농아인 공동체는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수어를 배우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궁극적으로 수어의 세계화란, 하나의 언어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 수어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고 소통의 다리를 놓는 노력에 있다. 농인들은 수어를 통해 단순히 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점에서 국제수어는 ‘통역 언어’라기보다는, 연결의 언어로 존재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