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만지는 언어 – 점자 이전의 촉각 소통법

by 정보주머니1 2025. 8. 19.

    [ 목차 ]

시각을 대신한 감각: 촉각 소통의 기원과 필요성

촉각 소통법
촉각 소통법

인류는 언어라는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어 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말과 글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시각 장애를 가진 이들은 문자와 그림, 제스처와 같은 ‘눈으로 읽는 언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소통의 길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감각, 특히 손끝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촉각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언어 체계를 만들어왔다.

촉각 소통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문명에서부터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 표면에 음각을 새겨 넣어 기록을 남겼다. 시각 장애인들은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여 돌출된 형태를 따라가면서 의미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이는 무의도적으로 탄생한 촉각 소통의 초석이 되었으며, ‘만져서 읽는 언어’라는 개념은 점자의 탄생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촉각은 단순히 문자를 대체하는 기능을 넘어, 공동체 내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였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글을 모르는 수도자들이 기도문을 외우기 위해 나무에 음각된 글귀나 기호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익히곤 했다. 이 방식은 단순한 신앙 행위를 넘어, 시각적 접근이 어려운 이들에게도 지식을 체득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한편 촉각 언어의 발전은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각 장애인은 단순히 읽고 쓰는 것뿐 아니라 일상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했다. 종교적 의례, 법적 문서, 거래 계약 등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글과 기호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제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 점토, 금속, 나무판 등에 양각이나 음각을 새겨 넣고, 그 표면을 손으로 더듬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기원적 형태의 촉각 소통법은 단순히 장애인의 편의를 위한 발명품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감각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언어가 반드시 ‘소리와 문자’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사례였다. 결국 점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수많은 촉각 기반의 실험들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손끝으로 읽는 언어’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점자 이전의 다양한 촉각 소통 방식

촉각 소통법
촉각 소통법

오늘날 점자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체계를 갖춘 촉각 문자로 자리 잡았지만, 그 이전에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방식들이 대부분 독립적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필요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주목할 만한 것은 양각 문자(raised letters) 방식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활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책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시각 장애인들은 여전히 독서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에 몇몇 인쇄소에서는 알파벳 자체를 돌출된 형태로 인쇄해 손으로 만져 읽을 수 있게 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학교에서는 실제로 이런 양각 문자 교재를 제작해 학생들에게 제공했으며, 이는 ‘눈 대신 손으로 읽는 책’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양각 문자는 알파벳 모양 자체가 복잡해 촉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18세기 후반에는 문자 대신 기호 체계를 사용한 촉각 소통이 시도되었다. 프랑스의 발렌틴 아위(Vallentin Haüy)는 시각 장애인을 위해 글자를 단순화한 양각 교재를 제작했다. 그는 손끝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알파벳을 단순화했지만, 여전히 글자를 따라 읽어야 하는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피로를 유발했다. 이처럼 점자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촉각 문자는 속도와 효율성에서 한계를 보였다.

흥미롭게도, 동양에서도 나름의 촉각 소통 방식이 발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시각 장애인들이 한글을 배우기 위해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손으로 더듬으며 익히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한글이 음소 문자라는 특성 덕분에 가능한 방식이었으며, 비교적 단순한 글자 구조는 촉각 학습에 유리했다.

더 나아가, 점자 이전의 촉각 소통은 단순히 문자 읽기에서 그치지 않고 물리적 기호와 상징체계로도 확장되었다. 예컨대 고대 로마의 법정이나 중세의 시장에서는 계약서의 증명으로 밀랍 인장을 사용했는데, 시각 장애인들은 인장의 요철을 만져서 특정인의 서명을 구별할 수 있었다. 또한 동전이나 화폐에도 돌출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손으로 만져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처럼 점자 이전의 촉각 언어는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그것은 ‘문자를 만져 읽는 것’에서부터 ‘사물의 형태를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것’까지 광범위한 실험의 연속이었다. 비록 그 어느 것도 완벽한 체계는 아니었지만, 이 시도들이 있었기에 루이 브라유의 점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즉, 점자는 완전히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수많은 촉각 소통 실험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점자 이전 촉각 소통법이 남긴 유산과 현대적 의미

 

점자의 등장은 촉각 언어 역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이전의 다양한 촉각 소통법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실험은 장애인의 교육권과 독서권, 나아가 인간의 표현 가능성을 넓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첫째, 점자 이전의 촉각 소통법은 ‘모든 감각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만, 손끝의 촉각 역시 정보 전달의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촉각 지도, 촉각 미술, 촉각 기반 기술(예: 촉각 디스플레이, 점자 스마트 기기)로 이어지며 여전히 활발하게 응용되고 있다.

둘째, 점자 이전의 시도들은 시각 장애인의 사회적 포용에 기여했다. 양각 문자 책이나 인장 확인 방식 등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시각 장애인들이 공동체의 중요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장애인을 단순히 보호와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의 자립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현대의 학자들은 점자 이전의 촉각 소통법을 통해 언어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고 있다. 언어란 단순히 소리를 문자로 옮겨 적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감각을 통해 사고와 의미를 공유하는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문자 이전에 사람들이 그림으로 생각을 전했듯, 촉각 소통은 문자와 음성을 넘어선 또 다른 언어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오늘날 우리는 점자를 ‘완성된 촉각 언어’로 인식하지만, 그 이전의 다양한 시도들이 없었다면 점자는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출된 알파벳, 나무판에 새긴 글자, 밀랍 인장의 요철, 화폐의 촉각적 무늬 등은 모두 시각 장애인과 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실험적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점자를 넘어 촉각 기반의 실시간 번역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에 진동과 돌출 패턴을 전달하여 문자 메시지를 손끝으로 바로 읽게 하는 기술이나, 3D 프린팅을 통해 촉각 전용 교재를 제작하는 기술이 그 예이다. 이는 단순히 시각 장애인을 위한 보조 수단을 넘어, 인간이 가진 감각의 다양성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결국 점자 이전의 촉각 소통법은 불완전했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가치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는 반드시 눈과 귀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도 충분히 말하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소통 방식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